아름다운 고장 칠곡 왜관읍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지명유래/설화전설

왜관리

‘倭館(왜관)’ 이란 조선시대 일본인이 건너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는데, 고려말기 이후 조선초까지 倭寇(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회유책으로 三浦(삼포)를 열어, 일본인이 왕래하며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여 倭人(왜인)과 통상을 하고, 일본 사신의 유숙 등을 위해 설치한 공관의 일종이었다.

당시 왜관이 설치된 곳은 부산부근 및 서울에 5개소, 낙동강의 중로에 倭使(왜사) 전담의 유숙소인 小倭館(소왜관)이 약목의 관호동과, 倭館面 錦山二里(왜관면 금산2리)의 두 곳을 포함하여 5개소로 도합 10개소인데, 그 지명이 현재까지 그대로 존속되어 오는 곳은 칠곡의 왜관 뿐이다. 당시에는 지금 倭館(왜관)의 중심지인 洛東江邊(낙동강변)은 모래밭으로 인가가 없었으며, 현 石田里(석전리) 일대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石田(석전)이라고 불리워진 곳이었다.

지금의 倭館邑(왜관읍)은 일본인들이 京釜線 (경부선)철도를 부설(1905년)하면서 지금의 舊 倭館(구왜관)에 역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그곳보다는 인가는 없어도 돌밭 앞에 펼쳐져 있는 낙동강변의 넓은 지대가 장래 발전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역 간판을 倭館(왜관)으로 달게 되면서부터 倭館(왜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제까지 倭館(왜관)이라 부르던 若木面 觀湖2里(약목면 관호2리)는 舊倭館(구왜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왜관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 래
웃개(上浦)·아랫개(下浦) 石田里 (석전리)자고산 일대에서 發原(발원)하여 回洞(회동)을 지나 洛東江(낙동강)으로 유입되는 巴彌川(파미천)을 경계로, 그 北(북)쪽을 웃개(현 왜관 1, 2, 3, 4리)라 했고, 南(남)쪽을 아랫개(하포)라 했다. 현재 巴彌川(파미천)은 1970년에 복개하여 도로로 활용하고 있는데, 칠곡군축협청사에서 낙동강으로 直向(직향)하는 하천이다.
갱빈(江邊)·입산이 개(入山) 현 왜관초등학교 남쪽과 동쪽에서 동정천 북쪽 일대의 강변 갯밭을 말하는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인 입산승(이리야마·노부루)이 荒(황)·한 불모지인 이곳 모래밭을 개간, 사과나무와 뽕나무를 심어 살았다고 해서 「입산이 개」라고 불렀다.이곳 일대가 강변 모래밭이라 인가가 없었으나 3·1운동 직후 碧珍李氏(벽진이씨)가 정착, 마을이 형성되면서 갱빈이라 불려 왔으며, 현재 왜관전신전화국을 비롯하여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行政區域上(행정구역상) 왜관 7, 12, 13, 14里(리)에 해당한다.
달오·月塢洞 月塢洞(월오동)은 倭館邑(왜관읍)에서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마을로서, 서쪽에서 동쪽을 보면 산이 달月字(월자) 모양으로 두둑을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달月字(월자) 두둑 塢字(오자)를 月塢(월오)라 불렀다고 한다.한편, 朝鮮 端宗 元年(조선 단종 원년)(1453)에 碧珍人 折衝將軍 李末丁(벽진인 절충 장군 이말정)이 星州椧谷(성주명곡)에서 이곳으로 移居(이거)해와 그 자손들의 世居之鄕(세거지향)으로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으며, 大司成 月塢 李均公(대사성 월오 이균공)의 號(호)를 따서 月塢(월오)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 뒤 오금재 고개가 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李如松(이여송)이 地形(지형)을 보고 맥을 끊은 자리라 전해오고 있다.
구장터 倭館邑 倭館3里(왜관읍 왜관3리)에 형성되었던 장터로서, 1905년 倭館驛(왜관역)이 設置(설치)되면서 市場(시장)이 成(성)되어 農水産物(농수산물) 및 各種 生活用品(각종 생활용품)이 去來(거래)되어 錦泉·星州·仁同(금천,성주,인동)외 인근지방에서 많이 利用(이용)되어 번창하였다. 현 왜관3리와 4리 사이 넓은 도로변에 設市(설치)되었으나 現代式 市場(현대식 시장)이 생김으로 사양길에 들었다.

석전리

본래 칠곡군 邑彌面 地域(읍미면 지역)으로서 九岩(구암)이 있다해서 돌밭(石田里)이라 하였는데, 1914년 行政區域 改編(행정구역 개편)때 冠洞(관동)·上石洞(상석동)·古堤(고제)·耳洞(이동) 일부를 倂合(병합)하여 石田里(석전리)라 해서 倭館邑(왜관읍)에 편입되었다.

석전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 래
考亭·古堤(고성.고제)

자고산에서 남으로 뻗은 丘陵(구릉)을 따라 上古堤·中古堤·下古堤(상고제,중고제,하고제)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形成(형성)되어 있었으나 1960년 美軍部隊(미군부대)가 駐屯(주둔)하게 되면서 현재는 上古堤(상고제)만 남아있다.

지금의 美軍部隊(미군부대) 자리에 奉化琴氏(봉화금씨)의 書堂(서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書堂(서당)이름이 考亭書堂(고정서당)이었으므로 그때부터 이 마을을 고정이라 불렀다. 긴 세월 동안 불러오면서 그 發音(발음)이 변하여 지금의 고지(古堤)로 바뀌었다 한다.

사거리

現 漆谷郡廳(현 칠곡군청)이 있는 부근을 말하며, 南(남)으로는 大邱方面(대구방면)(現在(현재)는 고속도로와 미군부대)이고, 서쪽으로는 창마 渡船場(도선장)을 건너 金泉(금천)방면, 東(동)으로는 安東(안동), 北(북)으로는 仁同(인동)으로 갈 수 있는 네 갈래 길이 있었다.

倭館驛(왜관역)이 생기고 日人(일인)들이 많이 살게 되어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만취골(萬取谷)·基地村·後門(만취곡).기지촌.후문

석전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석전 2리이다. 옛날 이곳에 山神堂(산신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성을 드리면 만사가 성취된다고 해서 만취골(萬取谷)이라 불려왔다. 碧珍李氏(벽진이씨)가 100여년 전에 이주하여 살았으며, 1960년 美軍部隊(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자 全國各地(전국각지)에서 생업을 따라 모여들어 급속도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미군부대 후문이 이곳에 있어 미군을 상대로 한 상가가 형성됨에 따라, 현재는 基地村 (기지촌)또는 後門(후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귀바위(耳岩)(이암)

마을 앞 남쪽에 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귀바위(耳岩)이라 한다. 文翼公 李元禎(문익공 이원정)이 350년 전에 枝川面 上枝(지천면 상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세거지를 잡아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원래는 이 마을에 10개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1개 바위가 소실되고 9개의 바위만 남아 ‘九岩(구암)’ 또는 ‘구바위’가 된 것이라 한다.

바위가 前九後一 左七石三(전구후일 좌칠석삼)으로 놓여있어 ‘河圖 洛書(하도 낙서)’의 形局(형국)이라 하며, 이 바위는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포졸들이 이곳 돌들을 운반해 가던중 城(성)을 다 쌓았다는 소문을 듣고 두고간 바위들이라고도 한다.

※ 河圖洛書(하도낙서) : 하도와 낙서. 河圖(하도)는伏羲氏(복희씨)때 黃河(황하)에서 용마가 지고 나왔다고 하는 일월성신의 모양을 그린 그림·洛書(낙서)는 夏禹氏(하우씨)의 9년 치수때 낙수의 거북 등의 占(점)으로 八卦(팔괘)의 법을 세웠다고 하는 것.

관터(基)

약 300년 전에 文翼公 李元禎(문익공 이원정)의 二子 校里公 漢命(이자 교리공 한명)의 후손들이 耳岩(이암)에서 이거해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옛날 이곳에 水鄕驛(수향역)의 驛(역)·이 있던 곳이라 해서 ·基(기)라 불려왔다.

金玉里·귀목동·상석전(금옥리.귀목동.상석전)

석전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웃돌밭(上石田)이라고 불리었으며, 옛날 이곳의 모래가 玉(옥)같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여 金玉里(금옥리)라고 했다.

벽진이씨가 400여년 전에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으며 아직도 후손이 살고 있다.

新基(신기)

顯宗(현종) 12년(1671) 文翼公 李元禎(문익공 이원정)(광해~숙종, 형조·이조판서)이, 이곳 참나무숲을 치고 새 터전을 잡아 집을 지었다 해서 새터(新基)라 불려왔으며, 1960년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마을이 크게 늘었다.

배터·석전 나루미리(石田津頭)(석전 진두)

석전리 서쪽 낙동강변에 있는 마을로 옛날 洛東江(낙동강)을 따라 부산으로부터 소금을 실은 배들이 다닐 때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 자고산 중턱에 興國寺(흥국사)와 萬壽泉(만수천)이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와 등산로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여우골(如意里)(여의리)

석전리 서북쪽 자고산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 金寧金氏(금영금씨)들이 살다가 平章(평장)목으로 이주해 갔다고 한다. 뒷산에 여우굴이 있어 비오는 날이면 여우들이 많이 울어 여우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북쪽 자고산 중턱에 興國寺(흥국사)와 萬壽泉(만수천)이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와 등산로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매원리

왜관읍에서 동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며 北(북)으로 龍頭山(용두산)이 나직하게 감싸고 있어 北背南向(북배남향)의 취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앞에 雅望山(아망산)과 서쪽 山斗峰(산두봉)이 싸여서 梅花(매화)같다하여 매원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칠곡군 파미면 지역으로 1914년 行政區域大改編(행정구역대개편)때 매원동이라 하여 왜관읍에 편입되었다.

매원은 상매·중매·하매로 구분하며, 梅院1里(매원1리)는 上梅(상매)와 盤松(반송), 梅院2里(매원2리)는 中梅(중매)와 下梅(하매), 梅院3里(매원3리)는 새마로 되어 있다.

매원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 래
盤松(반송) 梅院(매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주위에 盤松(반송)이 많다 하여 반송리로 불려왔으며, 조선 成宗(성종)때 德山人 李·先生(덕산인 이선생)이 八(팔)·(現 東明 현 동명)에서 이곳으로 移居(이거)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形成(형성)되었다고 한다.
梅院(上梅·中梅·下梅)·壯元坊 매원 (상매.중매.하매)·장원방

設村年代(설촌연대)는 미상이며, 옛날 이 마을에 院(원)이 있었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여 그 形局(형국)이 마치 梅花(매화)같다고 해서 梅院(매원)이라고 했다.

일명 壯元坊(장원방)이라고도 불리는데 朝鮮 宣祖(조선 선조) 38년(1605)에 洛村 李道長公(낙촌 이도장공)이 石田(석전)에서 이곳으로 移居 定着(이거 정착)함으로써 그 자손들 중 文科(문과)에 壯元登科(장원등과) 12명, 進士(진사) 10명이 배출된 文鄕(문향)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마(新基)

매원 서남쪽 山斗峰(산두봉) 南麓(남록)에 形成(형성)된 마을로 경부국도가 앞을 지나며 서쪽으로 미군부대와 인접하고 있다. 마을 뒤에 일제때 금을 채굴하던 金鑛(금광)이 있다. 이 金鑛(금광)이 번창하였을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日帝(일제)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新基)라고 부른다.

봉계리

왜관읍에서 東(동)으로 6㎞ 지점에 위치하며, 장원봉광 新岺山(신령산) 기슭에 자리잡고 북으로 道樂山(도낙산)이 우뚝솟아 同廷川(동정천)의 원류가 된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한 곳으로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옛부터 봉황이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봉계라 한다. 坡平尹氏(파평윤씨)들에 의해 설촌되었다고 하는데, 그후 任亂前 宣祖(임란전 선조)때 德山人 李德壽公(덕산인 이덕수공)이 盤松(반송)에서 이곳으로 이거 정착함으로써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世居地(세거지)로 繁昌(번창)을 누리고 있다. 본래 칠곡군 파미면 地域(지역)인데 1914년 行政區域改編(행정구역개편)에 따라 倭館邑(왜관읍)에 편입되었다.

봉계리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텃골(基谷) 道樂山(도락산) 기슭과 장자동에 자리잡은 獨家村(독가촌)이었으며, 봉계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해서 基谷(기곡)이라 했으나 현재는 인가가 없다. 이곳에 옛날 옹기굴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천주교 박해로 많은 天主敎 信者(천주교 신자)가 모여 살았다. 日帝時代(일제시대)에 倭館(왜관) 회동, 평장목 등으로 이사하여 倭館 純心高等學校(왜관 순심고등학교) 앞에 옹기굴을 만들고 왜관 성당을 건립하였다.
道 樂 洞(도락동) 鳳溪里 (봉계리)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주위의 경치가 秀麗(수려)하여 음력 삼월 삼짇날이 되면 住民(주민)들은 물론 隣近(인근)마을의 婦女子(부녀자)들이 모여 화전놀이로 즐겁게 지낸 곳이라 해서 道樂洞(도락동)이라 하며, 현재는 인가가 없다.
새마을 1975년 政府施策(정부시책)으로 산속의 獨家村(독가촌) 14가구를 한 곳에다 集村部落(집촌부락)을 만들어 살도록 하였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마을이라 한다. 현재는 3家口(가구)가 살고 있다.

삼청리

남으로 京釜線 鐵道(경부선 철도)가 횡단하고 경부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있으며 국도가 동서로 관통한 곳으로 交通(교통)이 번잡한 곳이다.

三淸里(삼청리)는 본래 칠곡군 파미면 지역인데 1914년 行政區域改編(행정구역개편)때 왜관읍에 편입되었으며, 邑彌·盧谷·道村(읍미.노곡.도촌) 등 3面(면)의 各地域 一部(각지역일부)가 倂合(병합)되었다 해서 이곳 錦淸池(금청지)의 이름을 따와 三淸洞(삼청동)이라 한다.

삼청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장다리(長橋장교) 梅院(매원) 앞에 市場(시장)이 있었으며 梅院川 (매원천)이남지역의 주민들이 매원천을 건너 市場(시장)을 가기 위하여 긴 나무다리를 놓았다. 마을이 다리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장다리(長橋(장교))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越梅·梧樹越(월매.오수월) 梅院(매원)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梅院川(매원천) 건너(越월)에 위치한다고 해서 越梅(월매)라고 지칭했으며, 이 마을 뒤 山麓(산록)에 梧桐(오동)나무들이 많아 梧樹越(오수월)이라고도 했다. 設村(설촌)시기는 未詳(미상)이며 한말 때 이거해 온 廣州李氏(광주이씨), 奉化琴氏(봉화금씨), 安東權氏(안동권씨) 3성이 주로 살고 있다.
못 고 개 三淸里(삼청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있었던 못 밑이 되므로 못고개라 한다.
1960년대에 全國 各地(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設村(설촌)되었으며, 주민들의 대부분이 양돈·양계업에 종사하고 있다.
沙羅洞(사라동)·홈골(椧谷명곡) 沙羅池(사라지)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바로 이 못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못 이름을 따 사라동이라 했으며, 地形(지형)이 오목하다고 하여서 홈골이라고도 부른다.

금산리

왜관 소재지에서 동남으로 약 4.5㎞에 위치한 錦舞山(금무산)(268m)을 동남으로 두고, 그 支脈(지맥)들이 동서로 뻗고 있는 谷間(곡간)에 형성된 마을들이다.

星州(성주)로 통하는 강나루가 있고 韓末 德山李氏 李汶(한말 덕산이씨 이문)이 이곳에 정착한 후로 자손이 번창하고 있다. 본래는 칠곡군 蘆谷面(노곡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倭館邑(왜관읍)에 편입되었고, 錦舞山(금무산) 밑에 있어 錦山洞(금산동)이라 했다.

금산리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딱실·楮谷(저곡) 京山誌(경산지)에 의하면 高麗 恭愍王(고려 공민왕)때 韓方道(한방도) 장군과 烈婦裵氏(열부배씨)가 이곳에 卜居(복거)하였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월오 천변에서 용마와의 일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600여년전에 淸州韓氏(청주한씨)가 世居(세거)하였다고 전한다.
한실(大谷대곡) 錦舞山(금무산)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大谷(대곡)이라 하였으며 250여년 전 광주이씨와 성산이씨가 이곳에 世居地(세거지)로 정하고 살았으나 지금은 倭館工業團地 造成(왜관공업단지 조성)으로 마을이 없어졌다.
야디기·野得·野谷(야득.야곡) 漢陽人 趙篩(한양인 조사)선생이 540여년 전에 世居(세거)하였다고 전한다. 趙篩先生(조사선생)이 妻家(처가)로부터 들 하나를 얻었다 해서 野得(야득)이라 했다고 전한다.
江 倉(강 창) 洛東江 水路(낙동강 수로)가 교통수단으로 이용될 때 군량미와 병기를 보관하던 창고가 江岸(강안)에 設置(설치)되었던 곳이라 해서 강창이라 한다. 韓末(한말)때 晋州姜氏(진주강씨)들이 살았다고 한다.

낙산리

왜관 소재지에서 南(남)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며, 東北(동북)에서 錦舞峰(금무봉)이 솟아 그 支脈(지맥)들에 의해 東·南·北 3面(동.남.북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마을이다.

본래 칠곡군 노곡면 지역이였으나 1914년 왜관읍에 편입되었으며, 洛東江(낙동강)과 錦舞山(금무산)의 이름을 따 洛山里(낙산리)라 하였다 한다.

낙산리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가실 (盧谷·盧湖洞노곡.노호동) 옛날 이곳에 큰 호수가 있었는데 그 湖水(호수)옆에 갈대가 많이 나 있었다고 하여 盧谷(노곡), 盧湖洞(노호동)이라고 했다 한다. 廣州李氏(광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보병골 (步兵洞보병동) 壬辰倭亂(임진왜란)때 일본군 步兵(보병)들이 陣(진)을 치고 駐屯(주둔)했던 곳이라 해서 步兵(보병)골이라 하기도 하고, 또 마을 둘레에는 곧고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어서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하다고 하여 寶屛(보병)골이라고도 칭했다 한다. 金海金氏 集成村(김해김씨 집성촌)이다.
돌틈(石峴)·배터 (船着場선착장) 강안에 튀어나온 산자락에 암벽이 있었다 해서 돌틈(石峴석현)이라 하고, 옛날에 倭船(왜선)들의 到泊場(도박장)이 있었다 하여 배터라고 불렀다.
新 基 洞 (신기동) 釜谷(부곡)에 살던 주민들이 약 70년전 농토를 따라 새로 터를 잡아 形成(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新基洞(신기동)이라 한다.
송골 (松谷송곡) 마을 입구에 500년 묶은 盤松(반송)이 자라고 있어 송골(松谷송곡)이라 하고 丹陽禹氏(단양우씨)가 200여년 전부터 살고 있다.
가마골 (釜谷부곡) 약 160여년전 金海人 金致世(김해인 김치세)가 淸道 伯谷(청도백곡)에서 移居(이거)하여 정착한 후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으며, 마을 앞을 지나는 시내가 산을 굽어 흐르는 모습이 말허리와 같고 마을의 地形(지형)이 가마솥과 같다하여 가마골(釜谷부곡))이라 부른다.

금남리

錦舞山(금무산) 南(남)쪽에 위치하여 錦南(금남)이라 하며, 본래 칠곡군 노곡면 지역이나 1914년 行政區域改編(행정구역개편)때 왜관읍에 편입되었다.

금남리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가래골·가라골 (楸谷·楸洞추곡.추동) 옛날 이 동네에 호도가에 속하는 가래나무가 많아서 楸洞(추동)으로 불리어 졌으며, 現在(현재)는 가래골이 변천되어 가라골로 전해지고 있다. 약 250여년 전 玄風人 郭基弘公(현풍인 곽기홍공)이 金陵(금릉)에서 이주 정착하여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
밤나무골 (栗村율촌)· 더붕골 옛날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栗村(율촌)이라고 불리어 왔으나, 庚申年(경신년)(1920) 大水害(대수해)로 들마을 사람들이 山(산)밑 栗村(율촌)으로 集團移居(집단이거)해 와서 栗村(율촌) 주민들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해서 더부골·더붕골로 지칭되었다고 한다. 星州李氏(성주이씨)가 200여년 전부터 세거지로 하고 있다.
南 山 里 (남산리) 가실마을 南(남)쪽 山(산)아래 있다고 해서 南山里(남산리)라 불렀다 한다. 平山申氏(평산신씨)와 昌寧曺氏(창영조씨)가 주로 살고 있다.
들 마을 倭館·桐谷(왜관.동곡)간 도로양편, 즉 들 가운데 마을을 形成(형성)하고 있다고 하여 들마을이라고 하였다.
두무실·두무리·두무등 (杜霧·杜舞·頭舞두무·두무·두무) 錦舞山(금무산) 둘레에 있는 마을 중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杜舞洞(두무동) 또는 頭舞洞(두무동)이라 불렀다.

아곡리

왜관 소재지에서 東北(동북)으로 약 4㎞ 지점에 위치하며, 北(북)으로 자고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본래 仁同郡 文良面(인동군 무량면)의 地域(지역)으로서 1914년 大行政改編(대행정개편)때 칠곡군 石積面(석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大統領令(대통령령) 제11027호로 倭館邑(왜관읍)에 편입되었다.

아곡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鵝谷·鵝湖·雁 (아곡·아호·안) 자고산 밑에 못 이름이 鵝旨麓池(아지록지)라 해서 아곡·아호라 하고 그후 鵝(아)(거위아)자가 雁(안)(거위안)자로 바뀌면서 雁(안)로 개칭되었다.
박실 (博谷박곡) 약 200여년전 안질사람들이 농토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므로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동네 뒤에 있는 산의 골이 깊고 넓어서 博谷(박곡)이라고 하였으나 뒤에 박실로 부르게 되었다.
등티 (嶝峠등상)·등태 산등성이에 마을이 있다고 등태라고 하다가 등티로 변음되어 불리어지고 있다. 金海裵氏(김해배씨)가 주성이며 1977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을 시행하여 현대식 주택으로 개선 되었다.
발샘 (足泉족천), 발새미 농민들이 비가오지 않아 기우제도 지내보고 하였으나 가뭄이 들어 애태우고 있던 중, 지나가던 도인 한 사람이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바로 곁에 물이날 샘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발끝으로 파니 물이 솟아나 이곳을 발샘(足泉족천)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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